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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영화 조커 리뷰 - 우울, 다크히어로, 호아킨피닉스, DC, 배트맨

by 씀씀이의 이모저모 2023. 3. 16.

 

영화 소개 및 줄거리

이 영화는 2019년 개봉한 영화로 감독은 토드 필립스가 맡았고 호아킨 피닉스가 주연을 맡은 영화입니다. 조커 특유의 우울함과 한 인간에 대한 비극을 잘 묘사하여 베니스 국제 영화제 황금사자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골든글로브 등에서 수많은 상을 받으며 작품의 진가를 인정받았습니다. 영화의 내용은 알다시피 조커의 인생에 관한 영화입니다.

어렸을 적에 학대를 당했던 조커는 갑자기 웃음이 터지는 병에 걸려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합니다. 우울과 불안 때문에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약을 받지만 그마저도 끊길 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코미디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삐에로로 일을 하면서 스텐드 코미디장에 가서 연습을 합니다. 하지만 그가 던진 조크에 제대로 된 웃음을 돌려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그를 무시하고 경멸하며 오히려 비난과 폭력을 행사합니다. 그는 단지 잘 살아가고 싶은 한 사람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사회는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그는 서서히 괴물이 되어갑니다.

 

노동자, 그리고 하층민의 삶

필자는 이 영화를 두 번 정도 보았습니다. 첫 번째는 다크나이트의 조커를 생각하며 그때의 향기에 취하고 싶어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다크나이트의 조커와 영화 조커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실망을 느끼며 집에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2번째는 필자가 다시 선택해서 이 영화를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필자가 호주에서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노동자로서 너무나도 힘든 나머지, 같은 상황을 가지고 있는 조커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싶었습니다.

결과적으로 필자는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조커를 보았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조커를 통해 위로받고 싶었습니다. 같은 노동자로서, 같은 바닥을 기고 있는 사람으로서, 아무도 나를 위로해줄 사람이 없는 거 같아서 조커를 다시 마주했습니다. 제갸 만약 히스레저의 조커를 보지 않았다면, 제가 원하는 영화대로 기대하지 않았다면, 전 이 영화를 더 칭찬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것 또한 저의 변명일지도. 전 좋은 영화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보는 눈이 없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영화 2번째 보고 깨달았습니다.

 

영화의 주인공 아서의 심적변화는 참으로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보통인척 해야 했습니다. 남들이 웃을 때 같이 웃으려 했고, 남들이 하는 것처럼 같은 행동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는 사회에 순응하고 싶었고, 누군가 웃으라고 하였기에 웃었습니다. 그는 껍데기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꿈을 비웃는 자들에게 분노하였지만 그는 그 분노를 제대로 표출하지도 못했습니다. 

자신이 무시당하고,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 또한 그는 배려했고 잘 지내려 했습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계단을 올라가듯 정말, 하루하루 지친 다리를 이끌며 인생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가장 힘든 것은 정상적인 척 하는 것"이라고. 

결국 나 답지 못한 것은 힘든 것입니다. 아무리 사회에 순응하려고, 집단에 적응하려고, 같잖은 안정감을 얻기 위해 나 자신을 포기한 아서는 결코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의지도 없이 신념도 없이 소속감 하나에 매달려 그는 평생을 허비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우발적 살인은 그의 인생을 바꾸는 트리거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아서가 처음으로 사회에 반항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었고, 그의 의지는 혁명적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비정상적임을 받아 들였을 때 비로소 진정한 조커가 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조커의 선택이 옳았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다만 나 다움이 없는 자신이란 그저 빈껍데기 뿐이라는 것을 영화는 조커라는 캐릭터를 통해 말해주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주관과 객관에 대하여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 나 자신은 주관적이어야 하는 객관적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모두 객관적인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인 것은 합리적으로 보이고 상식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입낟. 그리고 객관적이라 함은 남들이 봤을 때 더 그럴싸한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다고 한다고 우리도 같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나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아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가 나를 안다고 한다면? 나에 대해 얘기하는데 모두가 나와 다른 생각이라면? 내가 라면을 먹고 싶은데 사람들은 모두 내가 짜장면을 먹고 싶다고 얘기한다면? 이것은 정말 웃긴 일입니다. 어떤 것에 있어서 객관은 그저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한 도구로 쓰일 때도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한 개그가 남들에게 하나도 안 웃긴 개그가 있을지라도 그것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객관적이지 않다고 그 사람을 무시해서는도 안 됩니다. 객관은 무시의 정당성을 부여하지 않습니다. 조커가 조커가 된 것은 객관의 렌즈로 조커로 바라보았고 그것을 사회가 무시하고 조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끔 그것을 간과합니다. 이 세상에 무시받을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우리는 갖가지 이유로 무시와 조롱을 조장합니다. 

그리고 팩트, 객관적, 정당함, 정의 갖가지 허울 좋은 이야기로 누군가를 깔보고 그들의 몰락과 일그러짐을 외식하듯 씹어대며 포식합니다. 우리 인간은 불행해서 남들의 불행 또한 봐야 속이 배부른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커가 계단을 즐겁게 내려오는 장면은 모두가 인정하듯 인상적이었습니다. 

계단을 올라가는 것이 세상에 맞춘 아서였다면 그는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내려가는 즐거움을 안 게 아닐까요. 자신의 의지로 방송에 출연하는 것이 즐거웠던 게 아닐까요. 아서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쌍한 사람의 이름이 웃음을 만드는 자입니다. 우리는 불쌍한 사람을 소재로 개그와 같이 희화화 하는 것은 물론 누군가와 비교하며 행복을 매꿔가고 있지 않은가요? 나는 과연 누구 한명에게라도 따뜻한 귀를 가지고 그의 이야기를 귀 담아 들은 적이 있었을까요? 아서에게, 조커에게 단 한명만 그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그리고 그 한명이 나였었더라면. 우리 사회의 괴물 하나는 막을 수 있었을 거라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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