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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영화 밀양 리뷰 - 송강호, 전도연, 유괴, 종교, 스포주의, 명작 추천

by 씀씀이의 이모저모 2023. 1. 27.

영화 소개

영화 밀양은 2007년, 이창동 감독이 만든 영화로 송강호, 전도연 주연으로 큰 화제를 모은 영화입니다. 전도연씨는 이 영화로 60회 칸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제 44회 백상예술대상-영화 감독상을 수상할 정도로 훌륭한 작품입니다. 영화 줄거리를 간략히 얘기하면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남편 고향을 온 이신애는 그곳에서 피아노 학원을 차립니다. 새롭게 시작하려고 다짐하고 주변 관계도 잘 맺지만 아들이 유괴당하고 아들은 결국 강가에서 죽은 채 발견됩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는 교회에 의지하게 되고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인간들의 군상이 들어납니다. 그녀는 종교의 힘으로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교도소에 찾아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괴범 또한 교도소 안에서 주님을 믿으며 자신은 이미 용서받았다고 얘기합니다. 신애는 이 말에 충격을 받고 교회를 떠나 어둠 속에 갇히게 됩니다. 하지만 늘 곁에 있는 카센터 사장 종찬의 도움으로 조금씩 다시 일어서게 되고 마지막 장면은 자신의 머리를 자신이 자름으로써 영화가 끝이 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치밀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교회와 사회, 집단과 개인, 그리고 위로와 무관심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밀양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오밀조밀하게 잘 보여줍니다.  

 

종교에 관하여

제가 영화를 통해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무능함입니다. 신기하게도 가장 위로가 되어야 할 종교, 여기서 등장하는 교회 사람들은 신애의 고통에 전혀 무관심합니다. 그들은 신애의 고통이 아닌 단지 신애가 구원을 받는 것(전도)에만, 교회에 나오게 하는 것만 관심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신도들은 저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신도 중 하나인 약사가 신애를 처음 만났을 때 면전에 놓고 신애씨는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신애의 입장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폭력적인 말이었습니다. 약사의 말은 구원받지 못한 불쌍한 인간이라는 그들만의 선민의식이자 기독교의 관점에서 신애를 바라본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적 관점은 끊임없이 영화 곳곳에서 등장합니다. 아들을 잃은 사람에게 신의 뜻이 있다고 한다거나, 주님이 위로해 주실 것이다라든가, 햇빛 속에서도 주님은 존재하신다 라는 당연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고, 이해가 될 수 있는 말이지만, 그것이 신애에게는 뜬구름 잡는 얘기이고 오히려 그녀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한 사람의 고통을 바라보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철저하게 신애의 고통을 외면합니다. 그들은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을 하기보다 힘들지, 괴롭지, 아프지, 그러니까 "교회 나와"로 일관합니다. 그리고 그녀가 주님의 말을 했을 때 칭찬하고 격려하며 일종의 보상을 제공합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가 치밀게 하는 모습입니다. 

 

교회의 무능함이 가장 크게 드러나는 점은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야외 기도회 씬입니다. 교회에 상처받고 독기를 품은 신애는 가요 CD를 훔쳐 야외 기도회를 갑니다. 기도가 한창일 때 신애는 찬송가 cd를 그녀가 가져온 가요 CD로 바꿉니다. 일반적인 사고라면 가요가 나오면 기도를 잠시 멈추고 원인을 파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목사는 그 가요 가운데 기도회를 진행합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잠시 기도를 멈추고 원인을 파악하고 고치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데, 이 같은 태도는 교회의 무능함, 경직성, 그리고 맹목적인 단점을 잘 나타내는 장면입니다.

 

구원에 대하여  

영화에 등장하는 밀양은 어떤 곳일까요. 제가 보기에 교회는 교회답지 않고, 구원받은 자는 구원 받은 자답지 못한 것이 밀양이었습니다. 밀양의 뜻은 비밀을 머금은 햇빛입니다. 그렇다면 햇빛 속에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요. 이러한 밀양에 대한 질문에 밀양 토박이인 종찬(송강호)은 사람 사는 곳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밀양이란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햇빛 안에 비밀 또한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햇빛을 충분히 느끼는 사람 사는 곳이 바로 밀양입니다. 제가 영화를 보며 실망했던 교회든, 신애든, 종찬이든 그저 다 사람일 뿐입니다. 완전하지 못하고, 때로는 실수하고 가식적인,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인간답게 밀양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종찬은 신애를 좋아해서 계속 쫓아다니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그는 끝까지 교회를 신애 때문에 나오고 믿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종찬이야말로 기독교인이 아니면서 다른 이들과 달리 가장 기독교인의 역할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줄곧 신애를 전적으로 지지합니다.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신애가 말이 안 되는 억지를 부리더라도 그는 신애의 고통을 이해하며 그녀의 시선을 따라갑니다. 그만이 유일하게 그녀에게 진실했고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그녀는 다시 한 번 살아갈 힘을 얻습니다.

 

신애는 앞서 말한 것처럼 어쩌면 불행한 인물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불행과 상처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밀양으로 왔습니다. 바람핀 남편은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인정하는 순간 그녀는 실패한 사람이 되니까.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망가진 것을 직면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온 것입니다. 남편이 사랑했던 밀양에서 그녀는 (남편이 바람핀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새 삶을 시작하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자신 또한 남편을 얼마나 아끼고 좋아했는지, 그렇기 때문에 남편 고향에 왔다는 질서정연한 논리를 만들어냅니다. 그녀는 자신이 잘 살고 있음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을 욕하는 아줌마들과도 아무렇지 않게 친하게 지내며, 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땅을 보러다닙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그것의 결과가 아들의 죽음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 끊임없이 구원을 찾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그녀의 구원은 남편이었으며, 아들이었고, 그리고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모두 자신의 인정을 위해서 한 것들입니다. 타인의 도움으로 인한 구원은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녀는 마지막 장면에서 지금까지 맡기기만 했던 자신의 머리를 직접 자르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종찬은 거울을 들어줍니다. 결국 자신을 구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입니다.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과 있다면 그 사람은 어떤 계기로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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